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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 경희, 그리고 그녀를 사랑한 수인 - 그네들의 안타까움에 대하여

공피 2011. 1. 22. 16:03

관련영화 : 연애소설

 
 어제인 2007년 2월 22일은 고 이은주씨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째 되는 날 입니다. 용산 CGV에서 이은주씨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추모회를 열어 주셔서 <연애소설>을 다시 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고인의 대표작이라 꼽힐 영화이지만 대다수의 분들이 기억하는 <연애소설>이 그 본연의 것과는 다소 다르게 인식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글을 씁니다.
 
 "이별 없이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는 걸까? 언젠가 누군가가 꼭 내 곁을 떠난다. 지환의 아버지처럼 나의 아버지가 그랬고 사랑하는 나의 친구와 식구가 그리 할 것이다. 어쩌면 내가 먼저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 남아있는 사람은 하루하루가 얼마나 살기 힘든데 그들은 떠나버리는가. 지환, 수인, 경희. 그들은 어느 날 친구가 되었고 어느 날 헤어졌다. 수줍게 웃으며 만나 못내 미안하다는 말로 헤어졌다. 그러나 불편하다, 편치 않다는 이별 사유 저편엔 너무나 커다란 슬픔들이 꾹꾹 참고 있었다."
- 씨네서울 영화 평론가, 이종열
 
 


 

 지금 소개할 <연애소설>은 특별히 칭찬을 받지도 그렇다고 질타를 받지도 않은, 조용하게 우리 곁을 지나간 작품입니다. 대다수 분들이 <연애소설>을 아름답지만 다소 평범하고 심심한 영화 혹은 최루성 멜로 정도로만 평가 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묻어나는 인간의 감정, 그것이 얼마나 섬세하고 솔직하면서도 노골적이지 않게 표현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면 분명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연애소설>을 만나게 될 겁니다. 인간의 감정이 위대한 점은 다양성과 고유성이 공존하며 그 존재를 긍정함에 있습니다. 이 긍정을 표현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이것은 부정되어서는 안 될 감정의 본질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 본질을 정확하게 실천하고 표현하는 영화는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잭은 에니스를 사랑했지만, 그것이 잭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의 동의어가 될 순 없습니다. <왕의 남자>에서도 연산과 장생 사이에서 갇혀 있는 공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호평 받는 영화들의 공통점은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본질을 왜곡 없이 솔직하게 그려냈다는 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그 범주를 퀴어 무비로 한정지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것이 아니라 사랑은 대상의 차이일 뿐 감정의 다양한 표현이 중요하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예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역시 인간의 다양하고 솔직한 감정을 여지없이 보여준 수작이라 할 수 있겠죠. 만약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잭과 에니스의 관계만 드러났다면 혹은 <왕의 남자>에서 연산과 공길의 관계만 드러났다면 혹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츠네오가 조제를 끝까지 사랑했다면 위 작품들이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긴 힘들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연애소설>은 엄연히 수인과 경희의 사랑, 말하자면 비주류의 감수성에 대해서도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은 일부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의 대부분에 녹아 들어가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발견하고 인정한 관객은 많지 않습니다. 과거에도 수인과 경희의 사랑에 대한 글들이 올라오곤 했지만 어김없이 달리는 반박중 대표적인 하나가 수인이 지환을 좋아했다는 것 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그것이 어떻다는 겁니까? 여러분의 일생에 있어 한번 에 한 사람씩 만을 좋아했던 기억 뿐 이었을지 궁금합니다. 수인에게 있어서 경희와 지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듯 그 둘에 대한 사랑의 비교도 무의미 합니다. 진심을 담아 사랑을 표현할 수 없었고 죽음의 문턱에 서서 말한 고백은 차가운 대답으로 돌아왔습니다. 수인은 아버지를 보며 지환을 떠올리고, 지환의 소식을 들으며 고단한 병원 생활에 힘을 얻습니다. 수인에게 있어서 경희에 대한 안타까움과 지환의 편안함은 어느 하나가 선택되어지는 감정이 아닌 둘 모두 수인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그녀의 전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인에게 있어 지환만을 보셨다면 그녀의 마음을 절반만 이해한 것이며, <연애소설>이 줄 수 있는 감동을 절반만큼 밖에 얻어갈 수 없을 겁니다.

 

 이 영화의 진짜 반전은 수인의 첫사랑이 경희였고, 그녀는 죽기 전 까지 경희를 사랑했다는 점입니다.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것은 이 사실을 아주 효과적이고 극적으로 전달해주는 장치인 셈이지 이것 자체가 반전은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여기까지만 이해하고 이름을 바꿔 부르는 장치가 진정 표현하려 했던 그것을 생각하지 않음이 안타깝습니다. 대다수의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공유되지 못했던 혹은 안했던 수인과 경희의 소박한 사랑을 그들이 발견하거나 인정했다면 <연애소설>은 지금 보다 작품적으로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지만 어찌됐던 가장 큰 탓은 발견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은 탓에 있습니다. 저도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어릴 적 수인에게 새총을 쏘던 남자 같은 아이가(수인이 지환에게 자신의 첫사랑이라고 밝혔던) 후에 수인과 병실에서 같이 놀던 여자 아이, 그 아이가 경희일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볼 때서야 여러 장면과 편집을 통해 전후 관계를 파악하고 수인과 경희의 사랑을 확인하였습니다. 물론 이해가 빠르고 기억력과 직관이 좋은 소수의 분들은 한번 에 이해 하셨겠지만 대다수의 관객들은 저랑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연애소설>은 내레이션을 극히 아끼고(하지만 국내 관객들은 이것에 익숙해서 이것으로 나와야지만 정보를 얻었다고 맹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면과 편집을 통해서 흐름과 정보를 전달하는 부분이 대다수(특히 수인과 경희의 사랑에 관해서) 이기에 보통 관객은 첫 번째 감상에서 수인과 경희의 사랑을 느끼기엔 역부족이었을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가 아니면 한번만 보기에 현재의 본래 의도와 약간 다르게 받아들여진 감상 혹은 그렇게 의도 되어야 했던 감상(이 이유는 아래에서 밝히겠습니다.)이 대중과 평단에서 지배적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연애소설>에서 수인과 경희의 소박한 사랑에 감동 받고 이곳에 글을 써주시는 분들이 많이 있기에 단순히 이것이  저의 독단적인 생각이 아니라 영화를 대사 정보에만 의존하지 않고 꼼꼼히 보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발견하고도 남을 것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왜 감독은 수인과 경희의 사랑을 발견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을까요? 지금부터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하며 말해 보겠습니다. 작품 내적으로 보자면 수인과 경희의 소박하고 미묘한 사랑은 그렇게 감춰 놓음이 그 모습에 훨씬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수인은 죽음의 문턱에 서서 사랑을 말했고, 경희는 그것을 끝까지 외면해야 했던 안타까움은 그 만큼 조심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작품 외적으로 보자면 수인과 경희의 사랑은 엄연히 비주류의 감성입니다. <올드보이>를 기점으로 비주류의 감성이 국내 관객과의 소통에 성공한 케이스가 눈에 띄게 많아졌지만 <연애소설>이 제작된 당시만 하더라도 그 전까지 비주류의 감성이 소통에 성공한 경우는 <여고괴담 2>와 <번지 점프를 하다>정도 외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사실 이 작품들도 요즘에 와서야 소통에 성공을 한 것이지 개봉 당시엔 흥행에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여고괴담 2>같은 경우 당시로서는 <여고괴담 1>이 굉장히 흥행을 한 작품이라 이 참패의 의미는 크다고 생각합니다. <번지 점프를 하다> 역시 관객 95 만 명으로 앞서 말한 <여고괴담 2>보단 많지만 이것 역시 그 작품성이 비하면 큰 성공을 거뒀다고 보긴 힘듭니다. 이런 비주류의 감수성이 들어가면 그 작품성이 아무리 좋다 한들 한발자국 멀리서 바라보던 당시 상황을 볼 때, <연애소설> 역시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는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당시의 것과 비교하면 지금은 많이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래서 <연애소설>은 이한 감독님의 안전선 혹은 제작사의 지시에 의해 수인과 경희의 사랑이 잘 드러나지 않게 만들어졌고 영화 정보와 홍보 역시 세 남녀의 사랑과 우정 정도로만 표현됐을 뿐이라 당시에 이 영화가 비주류의 감수성이라고 생각한 분들은 극소수였을 거라 봅니다. 혹 그렇게 생각을 했을지라도 영화의 정보와 홍보에서 그런 부분은 전혀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 나 혼자만의 착각인가." 하고 넘어갔던 분들이 대다수였겠죠. 역설적이게도 감독 혹은 제작사가 본래 의도와는 다른 감상을 오히려 의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당시 사회 정서를 고려해 볼 때 흥행 참패를 모면하기 위해서 내려진 결단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과거의 감상이 현재의 감상일 필요가 없다는 건 대담하지만 자명한 통찰입니다. 당시의 상황에 의해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 본연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취급받았던 저의 안타까움은 수인의 그것만큼 아프고 슬펐습니다. 제작사도 그렇게 소개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감상에 구속받고 있지만 마음을 열고 진짜 <연애소설>을 감상할 때가 왔습니다.

 
 


 

 모든 걸 나눴지만 단 한 가지 나눌 수 없는 것을 사랑해 버렸고, 삶의 끝에서야 사랑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수인. 수인이 떠나는 그 날까지 그녀를 외면해야 했고, 자신이 떠나는 그 날까지 지환의 마음을 알지 못했던 경희. 죽음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고 하죠. 수인과 경희, 그네들의 안타까움을 가슴 한구석에 간직하며 살아갈 지환. 다시는 없을 안타까운 시간들, 그 시간을 기억합니다.
 

 

 


 
 그들이 편한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PS: 제게 너무 소중한 영화를 선물해주신 이한 감독님, 차태현씨, 손예진씨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시지만 우리의 마음과 스크린에서 언제까지고 살아 숨 쉴 아름다운 여인, 고 이은주씨에게 감사드립니다.
 
 
 

 

연애소설 Cut Movie 다운로드

 

 

 

네이버 영화에서 연애소설 리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만든 영상입니다.

 

"경희, 그리고 그녀를 사랑한 수인 - 그네들의 안타까움에 대하여"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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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일종의 해설이기 때문에 영화를 두 번 이상 본 후 읽어보는 것이 좋으며, 이 역시 결국 개인의 감상이기에 여러분의 감상과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애소설>의 큰 기둥인 수인과 경희의 사랑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과오는 저지르지 말길 바랍니다. 그것은 <연애소설>을 깎아 내림과 동시에 본인이 <연애소설>에서 얻어갈 수 있는 감동 역시 스스로 깎아버리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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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은 경희를 사랑했다고 생각합니다. 
 바비큰(bobbykeun) 님의 글, 2007.01.15 23:50

 

 일단 제 글을 보기에 앞서서 모든 선입견을 버려주시기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 영화에서 느꼈던 자신의 이해도 비워둔 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많은 대중의 의견이 아닌 다른 의견을 제시해보려 합니다. 물론 타당한 근거는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다수 관객들은 영화의 정보를 대사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영화일수록 말수는 적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배우들의 표정과 상황, 그리고 편집을 통해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편집이라 할 수 있는 장면의 배열은 영화의 깊이를 살리고 은유적인 정보를 전달해 줍니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핵심적인 장면의 배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편하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떠나버린 수인과 경희를 찾아 나선 지환. 지환과 경희가 만나기 직전 이야기는 과거로 돌아갑니다. 경희가 지환에게 이별을 고해야 했던 이유, 그것이 내레이션 같은 친절한 설명이 아니라 사건의 제시로써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첫사랑과 이름을 바꿔 불렀다는 다소 이상한 추억(일반적으로 성별에 어울리는 이름이 있으니까요.)을 간직한 수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첫사랑의 대상이 사실은 남자가 아닌 여자였고, 그 아이가 경희였다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나고 부터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이름을 바꿔 불렀던 그 아이가 경희였다는 사실만을 제시하며 우회적인 화법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바꿔 불렀다는 설정이 없었다면, 그래서 수인의 입으로 "사실 내 첫사랑은 경희였다."라고 말했다면 이 영화가 얼마나 불편했을까요. 이름을 바꿔 불렀다는 설정은 우리에게 수인의 첫사랑이 경희라는 사실을 그토록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줍니다. 영화는 당시엔 머리를 짧게 깎고 소년의 모습을 해서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관념을 뒤엎고 이들의 추억을 보여줍니다. 경희는 삶이 끝날 때까지 수인이라는 이름을 썼고, 수인 역시 마지막까지 경희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이것은 곧 이들의 추억이 단순히 어린 시절에만 갇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세월이 흐르고 병이 많이 악화된 수인은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왔음을 직감합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 그녀는 경희의 재밌는 농담을 뒤로한 채 그토록 아껴두었지만 말할 수 없었던 절실한 한마디를 건넵니다.

 

 "경희야, 사랑해."

 

 경희는 애써 무시하듯 이내 나도 사랑한다며 의례 것 대답해 버립니다. 끝까지 외면하는 경희를 보며 수인의 표정 역시 심히 어두워지고 그녀의 인생에 있어 가장 슬픈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집니다.(이 장면이 사실 약간 아쉬운 부분인데, 무균 막으로 인해 이 눈물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수인의 첫사랑이 경희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그 다음 장면에서 그녀가 "사랑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은 <연애소설>이 보여주는 가장 치밀한 구성입니다. 감독은 우리에게 수인의 "사랑해"가 남달랐음을 알려주기 위해 첫사랑의 대상이 사실은 남자가 아닌 여자였고, 그 아이가 경희였다는 사실을 바로 전에 제시한 것이지요. 이 배열은 "사랑해"에 대한 논란의 여지를 없애고자 하는 감독의 의지였다고 생각하지만 희망과는 다르게 이 배열의 중요성을 깨닫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이는 상투적인 내레이션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준 높은 전달 방법이지만, 문제는 영화를 한번만 봐서는 이것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습니다. <연애소설>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 역시 이것의 이해를 억누르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가장 표면에 보이는 배우들의 연기 역시 이것을 말하고 있음이 중요합니다. 수인의 표정에 있어 경희의 대답을 듣기 전과 후를 비교해 보면 이것이 보통의 것이 아님은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보통의 사랑이 아니기에 보통의 아픔이 아니었고, 보통의 무게가 아니었습니다. 이 장면에서의 분위기는 정말 아프고 무거웠습니다.

 

 경희는 그렇게 수인에게 안타까움을 안겨준 채 그녀를 떠나보냈고, 그 다음은 이야기 순서상 경희가 지환에게 불편하다며 이별을 고하는 장면입니다. 이 일련의 사건 제시를 경희가 지환에게 이별을 고해야 했던 사유라 할 수 있는데 분명 단순히 수인이 죽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결론은 쉽게 나옵니다. 경희는 수인의 감정을 죽기 전까지 외면해야 했던 미안함과 죄책감 때문에 지환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이별을 고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보잘 것 없지만 굳이 위의 주장을 덧붙여보겠습니다. 수인이 죽은 후 경희는 시계를 깨트리고 거꾸로 돌리는데 이는 단순히 시간을 돌리기 위함이 아니라 "나도 사랑해"라는 대답 대신 진심을 담은 다른 대답을 해주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닐 까 싶습니다. 또한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행위는 극 초반에 지환이 부여했던 의미가 담겨있는데 그건 "다음에 만날 때는 편한 친구로 만나자" 입니다. 수인의 첫사랑이 밝혀지는 장면에서 어린 수인은 수술하러 가는 경희와 이불을 덮고 같이 누워 있어줍니다. 수인이 죽은 후 경희는 똑같은 행동을 취하는데 이 행동에는 사랑한다는 영화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부제 역시 "사랑한다고 말은 못 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순간" 입니다. 이는 단순히 경희->지환, 수인->지환, 지환->경희 에서 더 나아가 영화에서 그토록 꽁꽁 숨겨놓았던 수인->경희, 경희->수인 까지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분명 영화에서 이것은 그림자처럼 살짝 살짝 내비치는 수준이지만 그렇다고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의 진짜 반전은 수인의 첫사랑이 경희였고, 그녀는 죽기 전 까지 경희를 사랑했다는 점입니다.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것은 이 사실을 아주 효과적이고 극적으로 전달해주는 장치인 셈이지 이것 자체가 반전은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여기까지만 이해하고 이름을 바꿔 부르는 장치가 진정 표현하려 했던 그것을 생각하지 않음이 안타깝습니다.

 

 예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았는데 사람은 누구나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여자가 여자를,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반드시 동성애자는 아니고 그걸 범용 적으로 크게 지속적으로 해야지만 동성애자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더군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잭은 잘 모르겠지만 분명 에니스는 동성애자라기보다는 잭을 좋아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죠. 분명 이성을 좋아해서 결혼도 하고 살았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보면 잭도 마찬가지이긴 하네요.(물론 그 생활이 순탄치는 않았지만요.)

 

 분명 수인은 동성애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경희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경희도 수인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역시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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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는, 흔히 볼 수 없지만 나는 볼 수 있는.

 고쓰캣(gothcat) 님의 글, 2007.05.09 03:36

 

연애소설을 이제서야 보다니 늦은감이 크지만 보았다는 것, 느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약간의 스포일러는 들었지만 영화 감상을 방해하진 못했다.
시간이 계속 교차되는 편집. 이런 방식이 아니었다면 재미가 참 덜 했을 것 같다.
처음 이 영화를 보고나서 리뷰들을 살펴봤을 때 난 단번에 많은 걸 알아봤구나 생각했지만
경희의 마음만은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봤고 못 보았던 것들이 보였다.
아직은 두 번의 감상이지만...

 

수인과 경희가 있다. 수인이가 경희고 경희가 수인이다. 여긴 여러가지 의미가 있었다.
어느날 그런 둘이 지환을 만났다. 우정이라는 이름의 사랑과 사랑이라는 이름의 우정.
그 경계선이 모호한 그라데이션. 아프고 아름다운..

 

현재의 경희는 사진을 찍고 부치지도 못할 편지로 쌓아둔다. 전해주지 못한 편지의 속죄인 양.
과거의 지환이 그랬던 것처럼 흑백 사진을 찍으며
과거의 수인이 그랬던 것처럼 손을 깨끗이 닦은 후 편지를 쓰고 머리를 기르고 노래를 흥얼거린다.
두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사랑하는 경희가 그리워하고 간직하는 방식일까. 여전히 경희로 살며 강아지 지환을 키우는 것도.
항상 같이 보였으면 좋겠단 말이 떠오른다.
스토커같은 우편 배달부가 다시 둘을 연결해주는 건 아마도 운명.

 

돌아가신 아버지가 마음에 있단 지환은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순간을 변치 않게 간직하는 사진을 찍었나보다.
수인이도 경희도 지환에게 변치 않고 남아 있겠지. 
편지를 보낸 사람을 찾아 시골에 다녀오던 그는 함께 여행하던 그날처럼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곱씹는다.

 

여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던 수인은 여행을 위해 가출을 감행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버렸지만 또 오자 약속했던 여름.
함께 해서 행복했던 시간. 한 방에서 함께 잘 수 있을만큼 순수한.

수인의 첫사랑도 그리고 마지막 사랑도 경희다.
파란 환자복을 입고 커트머리로 새총을 쏘아대던 경희를 남자로 알았었는지 여자인 줄 알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하지도 않다.
경희도 알고 있었을까. 경희에게도 수인은 친구 이상의 존재였지만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수인이 숨을 거두자 경희는 수인의 침대에 누워 함께 시트를 덮는다. 어린시절 수술실에 들어가던 그때의 그 침대처럼.
두 수인은 함께 죽음을 맞았다. [분신]같았던 사람. 경희는 "진짜 경희"같은 모습이 되어있지 않던가.

 

사랑하는 "친구" 지환, 사랑하는 "친구" 경희라고 못박은 말로 노래하며 둘을 축복하는듯한 수인은
어린시절 경희와 병원 침대밑에서 머리를 빗겨주고 얼굴을 어루만지던 것처럼 지환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마지막인 걸 아는 것처럼. 경희를 잘 부탁한다는 말 대신. "친구들과의 장난"이었다 말하며 눈물지어버리던.
훗날 서로의 얼굴을 서로 쓰다듬어주는 경희와 지환을 보며 수인이를 떠올렸다. 그 둘이 잠시나마 그랬을 것 처럼.

 

지환이 일하는 카페에서 경희와 수인이 잡지를 보며 심리테스트를 했었다.
수인과 경희는 둘 다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을 가졌다"는 결과가 나왔다.
지환은 "짝사랑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연애를 한다고 해도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고 나왔다.
어떤 잡지인지 몰라도 그건 정확도 100%였다.
수인은 아주 어릴 때부터 경희만 사랑할 수 있는 심장을 가졌고
지환은 수인에게 첫 눈에 반했지만 결국엔 경희를 좋아하게 된다. 서로가 좋아하지만 어긋났다.
경희는 첫눈에 지환에게 반했고,(적어도 호감을 가졌고) 경희의 한 사람은 지환이었다.
하지만 분명 셋은 서로를 모두 사랑했다. 남녀간의 사랑만이 사랑이 아니며 에로스만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다.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어쩌면 좋죠. 너무 아파요. 그런데 계속 아프고 싶어요.

 

내가 찾는 아이
흔히 볼 수 없지
넓은 세상 볼 줄 알고
작은 풀잎 사랑하는
워 워 흔히 없지 예 예 볼 수 없지
내가 찾는 아이
나는 볼 수 있어
사랑하는 내 친구 지환
사랑하는 내 친구 경희도
워 워 볼 수 있지 예 예 나는 볼 수 있어
워 워 볼 수 있어 예 예 나는 볼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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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리뷰에 대한 이은주씨 팬님의 화답.

 백세주(ifsad) 님의 글, 2007.03.10 03:40

 

그래 그래 내 말이 이말이야 분명히 난 연애소설을 보고 이렇게

느꼈는데 사람들은 무슨 소리야 라고 했다

아니 - 이 복선을 모르나 못 느끼겠어!

수인이 친절하게 난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심장을 가졌어 라고도 하고

자신의 첫사랑이 너무도 친절하게 경희라고 까지 이야기 했는데

(극중 지환은 경희라고 그 당시 짐작 못했겠지만)

 

이름을 바꿔서 부르기도 했다고도 했는데

 

그래 경희도 수인을 사랑했다고 말하기 힘들진 몰라도

확실히 수인은 경희를 사랑했다. 마지막에 사랑해 라고 말하고

나도 사랑해 라는 대답을 들은 후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란 말이야!

 

경희가 시계의 유리를 깨뜨려 시간을 되 돌리는 부분을 볼때

많은 사람들은 수인이 죽기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린다고 생각했지만

표면적으로는 한시간 전으로 돌린 것이니 그것이 맞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수인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그 시간으로 되돌리고 싶어 하는 것

이라고 느꼈다. 아마도 나도 사랑해 라는 대답보다는 다른 진심의 대답을

해주고 싶었던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수인과 경희 그리고 지환이라는 인물구조로 되어있는 연애소설을 보고

난 수인과 경희의 사랑을 표현하기엔 그 당시의 분위기와 상황 그리고

무엇보다 흥행의 측면을 고려한 지환이라는 인물이 등장 한 것 같다.

 

세상이 변했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아라는 영화가 개봉했고

그리고 흥행했다 하더라도 이것은 비주류의 영화가 일반 관객층에게 통했다

라고 하기는 너무 이른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왕의 남자의 이준기가 조금만 덜 예뻤더라면 어땠을까-

왕의 남자가 이렇게 흥행 할 수 있었을까?

 

비주류 코드는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여고생 시절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보며

굉장한 충격을 받은 것은 물론 (게다가 우리학교 연극부 언니가 영감을 줬단다

게다가 내가 내심 사모하고 있던 언니였어;;)

주홍글씨를 보고 난  말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있는데

여담이지만 우리 엄마가 그 사람 많은 극장에서 저년들 레즈였어! 라고 외쳤다

(이렇게 충격적일 줄이야 우리 엄마가 이렇게나 보수적이였어 ㅠ_-)

많은 사람들은 야유와 질타를 보내왔다.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비주류 코드라고 해서 영화내용과 관계없이

야유와 질타를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세상엔 수 많은 사람이 존재하고 수 많은 사람이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수 많은 사람의 사람만큼 많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는 이야기와 이별하는 이야기

한 남자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는 이야기와 이별하는 이야기

한 여자가 한 여자를 만나 사랑하는 이야기와 이별하는 이야기

 

그저 사람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일 뿐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 조금은 더 깨인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봐야 할 것이고

그들을 이해하기 보다 그 들은 평범한 시각으로 봐야할 것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가 우리 엄마를 그리고 아빠를 내 가까운 애인을 이해것 조차 힘들다.

그런데 그들을 이해하기 바란 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 것인가

 

그냥 있는 그대로의 그들은 바라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글을 쓰다보니 연애소설과 무관쪽으로 가버렸다.

난 항상 이래 삼천포로 늘 빠지지

 

하여간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시각으로 연애소설을 보았고 느꼈다.

그들의 사랑이 난 너무도 아리게 다가왔다.

 

나와 다른 느낌과 감정으로 연애소설을 본 사람들은

다시 한번 연애소설 DVD를 빌려서 이와 같은 시각으로 한 번 봐보길 바란다.

분명히 처음과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은주언니 2주기 추모제에서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연애소설을 보았고 언니의 1집을 들을 수 있었다.

 

오늘은 은주언니가 더욱더 보고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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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감동받은 포인트와 남들이 감동받은 포인트가 다르다는 이 난감함;;

 jojodancer 님의 글, 2007.01.17 05:35

 

사실 이은주씨 보려고 극장가서 봤던 영화입니다.

 

덤으로 손예진씨도.

 

아무튼 이 영화에서

 

제 감정을 가장 깊고 크게 움직였던 부분은..

 

다름 아닌 극중 손예진씨의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평생 사랑해오던 사람에게

 

죽기 직전에 고백을 했는데

 

자신이 전하고자 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의미의 대답을

 

자신이 했던 고백과 똑같은 말로 되돌려 받게 된 사람의 심정을요.

 

물론 슬픔이란 매우 좋은 감정은 아닙니다만

 

이 부분을 캐치 못하시는 - 혹은 안하시는 -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원문:
http://movie.naver.com/movie/board/review/read.nhn?nid=664956&code=34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