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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 절망의 절망의 절망

공피 2011. 1. 22. 16:21

 

 

Requiem For A Dream
Remaked Trailer

Directed by Void Shell(공피)




 

레퀴엠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꽤 많지만 지금 말하는 건 영문 제목 <Requiem For A Dream, 2000>의 레퀴엠이다. 자신과 친구들의 돈을 빌려 만든 소자본 영화 <파이>로 어마어마한 수입을 벌어들인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다음 작품이다. <레퀴엠>을 본 건 3년 전 쯤의 일이다. 혹시 몰라서 말하지만 당시엔 제니퍼 코넬리가 누군지도 몰랐고 그녀가 나와서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은 밝혀둔다. 그 전까지는 전혀 영화를 보지 않다가 조금씩 영화를 보기 시작하던 때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조금씩 보게 만들었던 동기가 <레퀴엠>이다. 그러니까 <레퀴엠>은 나에게 있어 영화의 시작, 그 자체이다. 영화의 관람에서도 그렇고 창작에 있어서도 그렇다. <레퀴엠>은 마약, 다이어트, 섹스 중독에 빠져들며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모습을 통해 현대인이 빠져드는 모든 중독에게 경고한다. 이야기 자체는 기발하지도 독특하지도 않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어떻게 보여 주냐에 따라 그 이야기가 가지는 가치, 전달력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영화가 사람에게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해준 작품이었다. 실제로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일주일동안 지옥에서 살았다. 진심으로 말하지만 절대 농담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으로 본 것이 전설의 SF 애니메이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 1995>이다. 난 참 운이 좋았다. <레퀴엠> 다음으로 이것을 보게 되다니. 엄청난 영상물 두 개를 연달아 접하면서 영화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다.


자신에게 있어 최고의 영화를 말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이 성격이나 가치관, 취향 같은 것들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라고도 보기 때문이다. <쇼생크 탈출>이나 <대부>, <레옹>같은 영화를 그렇게 말하는 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레퀴엠>의 경우는 다르다. 마약, 다이어트, 섹스 중독에 관한, 그래서 필연적으로 장면이 세게 나올 수밖에 없는 <레퀴엠>을 최고의 영화라 말한다면 혹자는 나를 변태, 싸이코로 취급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레퀴엠>이 최고라고 말한다. 이제 너도 나도 모두 쓰는 화면 분할, 몽타쥬, 패스트모션, 스노리캠(배우의 몸 앞이나 뒤에 카메라를 장착하고 촬영하는 것)은 캐묶은 것이 되었다. 물론 이런 기법들은 <레퀴엠> 이전에도 당연히 존재하던 것이지만 중요한 건 <레퀴엠>에서 만큼 효과적이고 대단하게 쓰인 작품을 본 적이 없다. 스노리캠 얘기는 빼놓을 수가 없는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스노리캠이 쓰인 장면과 보면 <레퀴엠>의 스노리캠이 얼마나 멋들어지고 효과적으로 쓰였나를 단번에 느낄 수 있다.


미술이나 색감에 대한 얘기도 빼 놓을 수 없는데 만인에게 인정받는 <올드보이>의 뛰어난 미술과 색감이랑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실내 세트, 건물, 엘리베이터의 분위기와 색감은 완벽했고 코니 아일랜드 에펠이 보이던 푸른 바다는 한없이 슬프게 느껴졌다.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바라보던 코니 아일랜드의 전경은 <레퀴엠> 그 자체를 상징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공개 석상에서 호의를 표한 감독은 곤 사토시이다. 나 역시 곤 사토시를 오시이 마모루 만큼이나 좋아한다. 특히 그는 곤 사토시의 <천년 여우>를 보고 "첫사랑의 환상과 광기를 그린 자극적인 작품. 나는 이 영화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라며 극찬을 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 <천년을 흐르는 사랑>이라는 다분히 그 영향을 받은 작품을 내놓았다. 하지만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영향을 받은 진짜 작품은 곤 사토시의 <퍼펙트 블루>이다.


피가 나오거나 사람이 죽으면 섬뜩하고 무섭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공포 영화는 무섭다. 하지만 피가 나오지 않는데도, 사람이 죽지 않는데도 섬뜩하고 무서움을 느낄 수 있다면 정말 잘 만든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레퀴엠>에서 제니퍼 코넬리가 욕조물 안에서 소리를 지르는 장면에 나는 정말 넋을 잃었다. 어떻게 저런 장면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때 나오는 음악 또한 너무 어울려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퍼펙트 블루>에서 하나에서 아홉까지 그와 똑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오마쥬였던 것이다. 그 이외에도 많은 부분이 닮았는데, 배경 없는 스튜디오에서 기계처럼 환호하는 사람들, 5초 이상의 긴 플래시백, 짧은 교차 편집의 남용은 영향을 안 받았다고 부인하기 힘든 흔적들이다. 5초 이상의 긴 플래시백은 <퍼펙트 블루>에서 훨씬 효과적으로 쓰였지만 욕조물 안에서 소리지르는 장면은 <레퀴엠>쪽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지게 쓰였다.


여기까지 정말 귀 따가운 칭찬을 잘도 들어줘서 감사하다는 생각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이러는 것도 나름 이유가 있다. <레퀴엠>은 전혀 상을 받지 못 했다. 물론 사라 역의 엘렌 버스틴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시카고 비평가상도 수상하긴 했지만 내가 말하는 건 영화 자체에 대한 상이다. 나는 이 영화보다 훨씬 못한 영화들이 수없이 상을 받는 것을 보았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수상한 알프레드 바우어상(실험 정신이 강한 영화에게 주는 상)도 받을 가치가 없는 것일까? (물론 출품이 먼저 이루어져야 되겠지만)


며칠 전에 어렵게 이 영화의 OST를 구했다. 무려 33개의 곡이 담긴 이 OST는 리믹스 버젼도 출시됐으며 메인 테마 ' Lux Aeterna'가 리믹스 돼서 <반지의 제왕 2 - 두개의 탑> 메인 테마로도 쓰였다. 이 OST는 내가 들어 본 그 어떤 영화 음악보다 신선하고 도전적이며 완벽했다. 음악상을 못 받은 건 너무도 아쉽다.


나는 네이버의 영화 평점을 많이 신뢰하는 편이다. 영화는 결국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영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대중의 평가는 중요하다. 물론 최근 대형 배급사에서 배급하는 영화들은 직원들이 평점 참여를 많이 하는 것 같아 좀 믿기 어려운 감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이 영화 평점이라는 것이 수학 문제처럼 답이 있는 게 아니라 상당히 주관적이긴 하다. 그래서 정말 많은 변수가 있지만 그럼에도 보편적인 흐름은 존재한다. 희망을 말하면 같은 작품이라도 점수를 더 얻지만 절망을 말하면 같은 작품이라도 점수를 깎는다. 물론 전자는 절망을 보여주다 클라이맥스에 희망을 보여주는 경우이고 후자는 희망을 보여주다 클라이맥스에 절망을 보여주는 경우이다.


<레퀴엠>은 정말 철저하게 후자의 경우이다. 대게 절망을 보여주는 작품도 그 끝머리에는 넌지시 희망을 보여준다. <올드보이>의 경우를 봐도 확실히 그렇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레퀴엠>을 본 사람은 안다. 일말의 희망조차 보여주지 않았던 감독에게 치를 떨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10점을 아낌없이 준다. 그들의 미래를 전적으로 관객에게 맡긴 감독에 대한 애증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도 아귀가 잘 맞은 화려한 기법에 반해서 일까.

 


마치며

DVD와 OST를 며칠 전 신품으로 어렵게 구했음.
OST 31번 트랙 'Meltdown' 듣고 감성에 차 편집 욕구 발동.

 

원래 순수 창작 영상물을 생각했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함을 깨달음.

예고편은 기존의 것을 수정한 게 아니라 DVD에서 새로 편집.
원판과 거의 비슷하지만 또 꽤 다르다고도 생각하기에
뻔뻔하게 리메이크라 이름 붙임.

 

근데 완성해놓고 보니 걸린 시간은 그게 그거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