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A/Movie RV

말죽거리 잔혹사 감독 유하의 시

공피 2011. 1. 22. 16:24

둥글게 커트한 뒷머리, 능금빛 얼굴의
 
여학생에게 편지를 썼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신청곡은 졸업의 눈물, 사랑의 스잔나 진추하가
 
홍콩의 밤 열기를 담은 목청으로 내 마음을 전했다
 
그 여학생은 내게 능금빛 미소만을 쥐어주고
 
달아났다, 금성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으로 들어가
 
그녀를 기다리며 서성이던 날들, 폴 모리아
 
질리오라 친케티, 사이몬 & 가펑클, 모리스 앨버트
 
그리고 한 순간 수줍게 라디오를 스쳐가던 그녀
 
그와 함께 진추하를 듣고 싶어요, 그 작은
 
라디오의 나라 가득히 드넓은 한여름 밤과
 
무수한 잔별들이 두근두근 흘러들어오고 난
 
그녀의 흩날리는 단발머리를 따라 새벽녘의 샛별까지......
 
그렇게, 열다섯 살의 떨림 속에 살던 나와 그녀는
 
영영 사라져버렸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건전지처럼 업혀 있던 그 풋사랑의 70년대도,
 
퇴락한 진추하의 노래를 따라
 
붉은 노을의 어디쯤을 걸어가고 있으리


 

유하 " 진추하, 라디오의 나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독한 마음의 열병,
나 그때 한여름날의 승냥이처럼 우우거렸네
욕정이 없었다면 생도 없었으리
수음 아니면 절망이겠지, 학교를 저주하며
모든 금지된 것들을 열망하며, 나 이곳을 서성였다네

 

흠집 많은 중고 제품들의 거리에서
한없이 위안받았네 나 이미, 그때
돌이킬 수 없이 목이 쉰 야외 전축이었기에
올리비아 하세와 진추하, 그 여름의 킬러 또는 별빛
포르노의 여왕 세카, 그리고 비틀즈 해적판을 찾아서
비틀거리며 그 등록 거부한 세상을 찾아서
내 가슴엔 온통 해적들만이 들끓었네
해적들의 애꾸눈이 내게 보이지 않는 길의 노래를 가르쳐주었네

 

교과서 갈피에 숨겨논 빨간책, 육체의 악마와
사랑에 빠졌지, 각종 공인된 진리는 발가벗은 나신
그캄캄한 허무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나 모든 선의 경전이 끝나는 곳에서 악마처럼
착해지고 싶었네, 내가 할 수 있는 짓이란 고작
이 세계의 좁은 지하실 속에서 안간힘으로 죽음을 유희하는 것,
내일을 향한 설렘이여, 우우
무덤은 너를 군것질하며 줄기차게 삶을 기다리네

 

내 청춘의 레지스탕스, 지상 위의 난
햇살에 의해 남김없이 저격되었지
세상의 열병이 내 몸 속에 들어와 불을 밝혔네
금지된 生의 집어등이여, 지하의 모든 나를 불러내다오
나는 사유의 야바위꾼, 구멍난 영혼, 흠집 가득한 기억의 육체들을
별빛의 찬란함으로 팡아먹는다네
내 마음의 지하상가는 여전히 승냥이 울음으로 붐비고
나 끝끝내 목이 쉰 야외 전축처럼
해적을 노래부르고 해적의 야꾸눈으로 사랑하리

 

 

유하 "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1"

 

 

 

 

 

나는 미국판 마분지 소설
휴먼 다이제스트로 영어를 공부했고
해적판 레코드에서조차 지워진 금지곡만을 애창했다
나의 영토였던 동시 상영관의 지린내와, 부루라이또 요코하마
양아치, 학교의 개구멍과 하꼬방,
난 모든 종류의 위반을 사랑했고
버려진 욕설과 은어만을 사랑했다

 

나는 세운상가 키드, 종로3가와 청계천의
아황산 가스가 팔 할의 나를 키웠다
청계천 구루마의 거리, 마도의 향불 아래
마성기와 견질녀, 꿀단지, 여신봉, 면도사 미스 리
아메리칸 타부, 애니멀, 뱀장어쑈, 포주, 레지, 차력사...
고담市의 뒷골목에 뒹구는 쓰레기들의 환흐, 유혹
나의 뇌수는 온통 세상이 버린 쓰레기의 즙,
몽상의 청계천으로 출렁대고
쓸모 없는 영혼이여, 썩은 저수지의 입술로
너에게 무지개의 사랑을 들려주리
난 구정물의 수력 발전소,
난지도를 몽땅 불사른 후의 에너지

 

세상이 나를 원하지 않을 것이기에, 태양의 언어 밖에서
난 노래한다, 박쥐의 눈으로 어둠의 광휘를
난 무능력한 자이므로, 풍자한다
호화 양장본 세상의 기막힌 마분지성에 대하여

 

나는 부유하는 육체의 세운상가
곰팡이를 반성하지 않는 곰팡이,
그리하여 곰팡이꽃의 극치를 향해가는 영혼

 

 

유하 "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3"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3'은 1996년 제15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저는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진추하, 라디오의 나날'이 마음에 드네요.
말죽거리 잔혹사는 이 시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게 아닐까 합니다.



원문: http://movie.naver.com/movie/board/review/read.nhn?nid=207922